동남아시아는 지금 한국 정수기 렌털 기업들의 최대 격전지입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한국산 정수기는 매년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물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물을 마시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조차 신뢰할 수 없는 현실. 이 불신은 한국 정수기 업체들에겐 기회가 됐고, 해외 매출이라는 결실을 안겨줬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중산층에게는 정수기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닙니다. 생존을 위한 필수 가전이자 가족 건강을 지키는 '보험'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정부의 수질 관리 능력에 대한 회의, 낙후된 상수도 시설, 반복되는 수질 사고는 국민 스스로 해결책을 찾게 만들었고, 그 해답이 바로 정수기였던 셈입니다. 정수기는 그 사회의 불신을 먹고 자란 산업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는 그런 동남아시아와 정반대의 경험을 했습니다.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호주와 뉴질랜드에서였습니다. 한적한 도시의 호텔에서 생수가 없길래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더니, 직원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욕실 수돗물 드시면 됩니다" 처음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익숙했던 경고음 "수돗물 절대 마시지 마세요"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도꼭지를 틀어 마신 물은 냄새도 없고 시원했습니다. 몸이 아닌, 마음이 먼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수돗물은 단지 물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과 시민 간의 신뢰를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걸요. 물론 청정국가이긴 하지만, 정부가 물을 책임지고 있고 시민은 그 책임을 믿기에 물을 마시는 일은 고민하지 않는 사회. 그 투명한 한 모금이 말없이 많은 것을 설명해줬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정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수돗물을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수돗물을 마셨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는 여전히 생수나 정수기를 찾게 됩니다. 수질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불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생각해봅니다. 한국도 수도꼭지를 틀어 안심하고 물을 마실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요? 단순한 수질 개선을 넘어, 국민 누구나 수돗물을 신뢰할 수 있는 사회. 정수기나 생수에 기대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물 한 잔을 당연하게 마실 수 있는 환경. 그런 당연함이 일상이 되는 날을 조용히 기다려 봅니다.
뉴질랜드 퀸스타운 전경.(사진=뉴스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