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엄마.' 자기를 낳아 '준' 여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겐 엄마가 없습니다. 낳았다고 해서 다 엄마는 아니죠.
의류수거함. (사진=마포구)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니" 따위의 일상적 질문도 제겐 부담입니다. '부모'라는 두 글자가 인생 최대의 콤플렉스이니까요.
질문을 받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그 몇 초의 어색함조차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연을 끊었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다시 붙일 수 있다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말합니다. "끊었다"는 건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표현인데 말이죠.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부모는 너무나도 좋은 존재구나. 부모와 단절된 삶을 추구해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구나' 하고요.
그럴수록 그들 의식 속에 너무도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부모의 존재'가 궁금해집니다. 그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요.
부러움을 넘어선, 일종의 기이함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그래서 드라마도 잘 보지 못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티격태격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장면들이 낯설게만 다가오니까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다르다."
이 문장은 아마도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쓴 걸 겁니다. 너무도 부러워서, 행복한 가정의 이유를 탐구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던 거죠.
행복이라는 이상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도달하려 애쓰다가, 오히려 존재의 진짜 충만함과는 멀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행복의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불행한 가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꽤나 큰 장점이니 더 큰 욕심은 안 내렵니다.
그래도 헌옷수거함에 옷을 버리러 가는 순간을 즐겁습니다. 한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니까요. 예전에 절 낳은 사람들이 사준 옷은 이제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