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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 너머의 세상
입력 : 2025-04-24 오후 5:19:09
며칠 전, 블루투스 이어폰을 잃어버렸습니다. 출퇴근을 책임지는 든든한 존재였는데,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이어폰 없는 출퇴근길에서는 어떻게 전투력을 끌어올려야 하나 싶었습니다. 마트로 장을 보러 갈 때도, 불광천을 달릴 때도 이어폰은 없었습니다. 이어폰을 다시 사면 되는 거 아니냐 싶지만, 이상하리만큼 귀찮음이 올라와 이어폰 없이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기자가 분실한 QCY의 'HT08 멜로버즈 프로 플러스' 블루투스 이어폰. (사진=QCY).
 
가장 어색한 건 출근길이었습니다. 노이즈캔슬링 기능과 흥겨운 음악소리는 그동안 시끄러운 경적을 막아주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무리 지어 등교하는 학생들의 수다 소리 사이로는 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습니다. 매일 아침 구산역 3번 출구 앞에서 헬스장 전단지를 나눠주시는 할머니. 전단지를 나눠주시며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굴 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이어폰에 가로막혀 그간 인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어르신의 인사를 안 받았다는 생각에 가벼운 목례로 인사했습니다.
 
퇴근길엔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렸습니다. 구산역 인근 원룸촌은 길목이 좁아 일방통행 도로가 많습니다. 인도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아 앞에 사람들이 지나가면, 자동차는 기어가다시피 갈 수밖에 없습니다. “빵”하고 운전자가 경적을 울리기 전, 뒤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길을 비켰습니다. 보행자도 운전자도 한결 가벼운 퇴근길이 됐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불광천을 달릴 때였습니다. 있는 힘껏 달리다 지치면 걸으며 숨을 고르는 소위 ‘걷뛰’식 운동이었습니다. 숨이 차오를 즈음, 텐션을 올리는 노래 대신 저의 숨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페이스는 안 되겠다’ 싶어 속도를 줄였습니다. 숨소리도 함께 잦아들고, 평소보다 더 오래 뛸 수 있었습니다. 제 몸에 오롯이 집중한 게 얼마 만인지. 이전 운동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헐떡이는 숨에 묵혀둔 고민들도 함께 털어낸 순간이었습니다.
 
이어폰은 세상의 소음을 막아주는 ‘방패’였습니다. 나도 말하지 않고, 누가 말을 걸지도 않는 게 편했습니다. 취재원들과 전화할 때를 빼면, 하루에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일도 많지 않습니다. 식당에 들어갈 땐 “안녕하세요”, 가게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 하는 정도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말 한마디 없이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소리에 조금 더 집중해 보려 합니다. 감사를 건네는 인사,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더 따뜻하게 데워보겠습니다.
 
이명신 기자 sin@etomato.com
이명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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