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서랍 속엔 어린 시절에 보내주고 싶은 편지 같은 게임기가 있습니다.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SIE)가 2018년 12월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PS) 클래식'입니다.
PS 클래식은 제품 상자도 원본 PS와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졌다. 본체 크기는 게임패드와 비슷할 정도로 작다. (사진=이범종 기자)
PS 클래식은 1994년 출시된 첫 플레이스테이션의 복각판입니다. 부피가 원본보다 80% 작아서,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으니 당연히 CD를 넣을 순 없고요. 미리 설치된 고전 게임 20개만 즐길 수 있습니다. 다만 비공식 프로그램을 통해 게임 소프트웨어를 바꿔 넣을 수 있습니다.
당시 SIE가 PS 클래식을 낸 이유는 닌텐도가 낸 복각판 게임기에 밀레니얼이 열광했기 때문입니다. 닌텐도의 클래식 게임기 시리즈는 PS 클래식 출시 전까지 1000만대 넘게 팔렸습니다.
PS 클래식. (사진=이범종 기자)
하지만 PS 클래식은 출시 직후 비난에 시달리며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국내 정가 11만8000원에 발매됐지만 새 상품이 3만~4만원대에 팔리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PS 클래식에는 아날로그 스틱이 없던 초기형 게임패드 두 개가 동봉됐습니다. 원형 게임패드 이상으로 잘 복원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인데요. 문제는 이 게임기에 수록된 20개 게임 가운데 길이 남을 흥행작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점입니다. 특히 SIE는 아날로그 스틱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인칭 슈터(FPS) '레인보우 식스'를 넣어 구설에 올랐습니다. 게임 화면에 출력되는 프레임 수가 적은 점도 문제로 지적됐습니다. 한국 발매판은 한국어화가 돼 있지도 않습니다. 한국에 정식 발매된 첫 PS는 2002년에 국내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 2였지만, 역시 아쉽습니다.
고전 콘솔 게임답게 4대3 화면으로 출력된 'FF VII'. (사진=이범종 기자)
하지만 저에겐 이 PS 클래식이 편지 말미에 적힌 추신(PS.) 같습니다. 그 시절의 저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면, 말미에 '파이널 판타지(FF) VII' 하는 날이 올 거라고 적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PS는 귀한 게임기였고, 1997년 발매된 파이널 판타지 VII도 월간지에서나 구경할 수 있던 사치품이었습니다. FF VII은 시리즈 처음으로 3D 폴리곤 그래픽이 적용돼 업계의 이목을 끌었고, 지금도 FF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지금은 세련된 실사 그래픽이 적용된 리메이크 3부작 중 두 편이 나와있습니다. 저는 리메이크판을 모두 샀지만, 원작을 먼저 하고 싶다는 생각에 초반부 이후 진행을 미뤄왔습니다.
서랍 앞뒤에 구멍이 있어서 PS 클래식을 넣어둔 채 구동할 수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그러다 마침내 작고 귀여운 오리지널 PS로 FF VII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어젯밤 PS 클래식의 첫 구동 화면을 보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손바닥엔 땀이 났습니다. 평소 PS5로 대작 게임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설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터넷으로 구매한 '게이머즈' 공략집을 보며 초등학생 시절 만들지 못한 추억의 빈칸을 채우려 합니다. 이 기분만으로도 PS 클래식은 충분히 가치 있는 콘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