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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
입력 : 2025-01-15 오후 8:51:44
(사진=뉴시스)
 
몇 년 전 국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열풍이 불면서 '소확행'이라는 신조어가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로 부상한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하루키에 심취했던 한때가 있었는데요. 당시에는 그의 작품보다 하루키라는 인간에 대한 흥미와 매력이 더 끌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유의 감각적인 묘사와 세련된 문체가 넘쳐났던 소설보다는 작가의 내밀한 정서와 사상을 좀 더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에세이에 손이 자주 갔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작가가 소확행의 의미를 정의한 어느 에세이집의 한 구절에 밑줄을 치고 어디선가 그럴듯하게 써먹기 위해 기억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다른 의미로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회자 되면서 책장 구석에 꽂혀있던 에세이집을 다시 펼쳐보았는데요.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라는 에세이에서 처음 언급된 소확행의 정의는 이러합니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개켜 돌돌 만 깨끗한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이 인생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땐 일상에서 비교적 쉽게 자존감을 스스로 높일 수 있는 삶의 태도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만의 소확행을 찾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구요. 대부분은 관심이 시들해졌거나 귀찮아서 중도 포기했지만, 몇 가지는 일상의 루틴으로 자리 잡은 것들이 있습니다. 늦은 저녁 인적 드문 호수공원을 홀로 달리거나, 좋아하는 향을 피우고 집안 구석에서 요가를 하는 것이 대표적인데요. 그동안 일상에서 지극히 소소하고 개인적인 고민, 불만이라고 해봐야 런닝하는데 지장 받지 않을 날씨에 대한, 몇 년째 정복하지 못하고 있는 고난도 요가 동작에 대한 것들이 전부였죠.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개인적인 소확행을 누리는 것이 심적으로 편하지 않고 집중도 잘되지 않습니다. 시발점은 아마도 12.3 내란 사태 이후였던 거 같습니다. 누군가는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에도 윤석열 퇴진과 내란 정국 정상화를 광장에서 외치고 있는데 한가로이 소확행이나 누리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김용태 신부의 비상계엄 시국미사를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접하게 됐습니다. 종교를 불문하고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온 저에게도 그의 시국 강론은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가 소확행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의 멘트가 큰 위로가 됐는데요. 그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동'으로 살아남은 자,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서 의무감을 갖고 그동안 희생된 많은 이들을 함께 기억하면서 그들이 못다 이룬 뜻을 이어받아 개인의 작지만 소중한 행동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는데요. 이 말은 마음 한구석에 남은 부채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15일 오늘은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지 2주 만에 집행된 날입니다. 이제 광장에서의 구호도 바뀌겠죠. 거창한 대오각성은 아니더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동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내란 정국을 수습하는데 힘을 보태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혜현 기자 hyun@etomato.com
이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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