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메일
페이스북 트윗터
빈 카운터의 시대
입력 : 2025-01-14 오후 6:39:00
[뉴스토마토 박혜정 인턴기자]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여성 교도소에서 복역한 실존 인물의 회고록을 각색한 이야기입니다. 범죄 코미디인 이 드라마의 뷴위기가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교도소가 민영화되면서, 비용 절감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폐단이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맛이 없었던 급식은 원재료를 알 수 없는 곤죽으로 바뀝니다. 재범률을 낮출 교육 프로그램은 무보수 노동 프로그램으로 대체됩니다. 수용한계를 초과해 쏟아지는 재소자들에 통제는 더 어려워지고. 부당한 대우를 견디다 못한 기존 교도관들은 집단 사직을 해 자격 미달의 새 교도관들로 채워집니다. 실무자라면 상상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재무재표만을 보고 판단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이미지=챗GPT 생성)
 
이런 일을 자행하는 리더를 우리는 ‘빈 카운터(Bean Counter)’라고 비꼽니다. 직역하면 콩을 세는 사람. 모든 일을 숫자와 데이터 만으로 접근하는 경영인 또는 재무 회계 전문가를 뜻합니다. 최근 이 단어가 더 많이 거론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 말 벌어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두고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 내부 직원들이 김이배 제주항공 대표이사를 소환했습니다. 김 대표가 영입된 이후부터 회사가 원가 절감에 집중해 안전 문제, 업무 과중, 직원 이탈이 심화됐다는 겁니다. 동일한 비판을 받고 있는 국내외의 기업인들이 있습니다. 위기론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 연구개발 조직을 망쳤다고 평가받는 브라이언 크르자니치 인텔 전 CEO, 기체 결함의 주역으로 뽑히는 20년간의 보잉 CEO들이 그들입니다.
 
신문 밖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빈 카운터들과 마주합니다. 유튜브에 ‘부자되는 법’을 검색하면 유명 유튜버들이 사업을 차려 원가 절감과 노동 착취를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영상에는 자본주의 사회 아래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똑똑한 것’이라며 찬양하는 댓글이 달립니다.
 
빈카운터 리더의 대칭점엔 고된 노동과 저임금을 경험한 뒤, 사회와 단절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일도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쉬었음’ 청년이 42만명이나 된 원인을 전문가들은 일자리 질 하락에서 찾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빈 카운터는 기업을 좀먹는 주범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이 좀먹는 것은 비단 기업뿐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애서 민영화 이후 교도소는 결국 파국을 맞습니다. 과잉진압으로 사람이 죽고, 폭동이 일어납니다.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숫자 뒤 사람을 보지 못하는 리더 곁에는 참사와 사고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셈입니다.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위기의 시기에는 빈 카운터 처럼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다만 효율과 이익만이 선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으면, 또는 그것이 사회구성원의 당연한 가치관이 된다면, 그때부터 사회는 병들게 됩니다. 건조한 숫자에 가려진 인간은 그저 돈벌이 수단이 될 뿐이니 말입니다. 
 
박혜정 인턴기자 sunright@etomato.com
박혜정 기자
SNS 계정 : 메일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