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우리 공동체 고유의 사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풍류도(風流道)’에 대한 모든 정보를 최대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 신화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인간중심적이고, 융합적 통섭적인 원형적 사유의 특질을 문자로 정착시킨 가장 오래된 자료는 통일 신라 말기에 와서야 등장합니다 신라 말기의 문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 와서야, 이런 원형적 사유의 특질을 문자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76자(字)밖에 인용이 되어 있지 않은 <난랑비서>는 매우 논란이 많은 문헌입니다. 우선, 제목부터가 논란거리입니다. <난랑비서>라는 제목을 글자만 보면, ‘난랑비(鸞郞碑)’란 화랑인 난랑(鸞郞)이라는 인물을 위해서 세운 비석을 지칭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난랑비’를 검색을 해보면, 아직까지도 “신라의 화랑인 난랑(鸞?)을 위하여 만들어진 비석”이라는 설명이 버젓이 나옵니다. 이런 설명은 다 오류입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가 일부 인용돼있는 《삼국사기》 제4권 진흥왕 37년의 기사 원문 사진. 사진=필자 제공
비석을 세워줄 정도로 공이 큰 인물이라면, ‘난랑’이라는 단어가 인물의 고유명사라면, 난랑이라는 인명을 다른 사료(史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야할 텐데 이 시기 사료에는 ‘난랑’이라는 인명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난랑(鸞郞)’이란 ‘화랑(花郞)’의 별칭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난랑’이란 단어에서 ‘난(鸞)’이란 ‘난새’ 즉 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새인 ‘봉황’의 별칭입니다. 조선시대까지, 사람들은 자식을 낳았을 때, 자식이 빼어나면 과장해서 띄워주는 의미로 “아이가 난새와 같구나”라는 표현을 즐겨 썼습니다. 여기에서 ‘난새’란 “빼어난 인물”이라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렇게 보면 ‘난랑(鸞郞)’이란 말은 ‘화랑(花郞)’이란 말처럼 아주 “뛰어난 인물” 이라는 뜻을 지니게 됩니다. ‘난랑비’에서 ‘난랑’이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화랑’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난랑이 고유명사라면 이 시기의 다른 사료에서도 이 사람의 일생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난랑’이라는 고유명사는 다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특정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난낭비’란 “화랑을 기념하는 비석”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비석을 세운 신라 진흥왕 때는 화랑도를 부흥시키고 제도화시켜 ‘국선(國仙)’이라는 이름으로 화랑을 국가의 높은 벼슬로 인정하기 시작한 진흥왕 37년이기 때문에, ‘난낭비’를 “화랑을 기념하는 비석”이라고 해석할 만한 이유가 명확하게 있습니다. 화랑도를 부흥시킬 때인 진흥왕 때 세운 비석이기 때문에, 개인 화랑 한 사람을 기념하는 비석이라기보다, 화랑도 자체를 기념하는 비석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 비석의 문장은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었으며, 난랑비는 돌비석에 최치원의 글 전문을 새겼을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난랑비라는 실물은 전해오지 않고, 《삼국사기》 진흥왕 37년 기사에 최치원의 서문 일부인 76글자만이 인용되어서 전해오고 있습니다. 최치원은 난랑비의 비문 앞에 서문을 붙여서,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사유 형태인 풍류도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에서 풍류도(風流道)를 언급한 것은 진흥왕 때 부흥시킨 화랑도가 우리 고유한 사유형태인 풍류도와 맥락이 닿는다고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최치원 선생이 화랑도와 풍류도의 맥락 관계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사상으로 풍류로가 있음을 최초로 문헌 기록으로 남긴 최치원의 초상화. 사진=필자 제공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에 고유한 ‘바람의 흐름[풍류(風流)]’이 있어왔다고 하면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가물하고 오묘한 길[현묘지도(玄妙之道)]이 있으니, 이를 ‘바람의 흐름[풍류(風流)]’이라고 합니다 이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신선의 역사[선사(仙史)]》라는 글에 상세히 갖추어져서 실려 있습니다. 이는 실로 유교, 도교, 불교의 세 가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어서, 모든 중생과 접해서 이들을 변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들어오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 바치라는 것은 노(魯)나라 사구(司寇, 공자를 가리킴)의 뜻이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것은 주(周)나라 사관(史官, 노자를 가리킴)의 가르침이며, 어떤 악행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태자(싯다르타를 가리킴)의 가르침입니다.”
최치원이 말한 ‘가물하고 오묘한 길[현묘지도(玄妙之道)]’과 ‘바람의 흐름[풍류(風流)]’은 한국사상의 원초적 특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가 인용한 《신선의 역사[선사(仙史)]》라는 책은 아쉽게도 오늘날 전해오지 않아 내용을 전혀 확인할 수 없지만, 최치원에 따르면 이는 “유교, 도교, 불교의 세 가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 철학사에서 서로 다른 가르침을 융합하려는 전통은 이렇게 오래 전으로, 거의 한국 철학사의 출발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나라에는 ‘풍류도(風流道)’라고 하는 고유한 사상 체계가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풍류도에 관한 문헌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최치원이 <난랑비서>에서 남긴 기록은 매우 중요합니다.
최치원은, “우리나라에는 가물하고 오묘한 길[현묘지도(玄妙之道)]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현묘지도(玄妙之道)”란 오늘날의 말로 풀어보자면, ‘최상의 가르침’, 곧 철학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풍류도란 우리 공동체에 존재했던 고유의 최상의 가르침이자, 우리 공동체의 본유의 철학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난랑비서>에서 최치원은 우리의 전통 사상인 풍류도가 “유불도 삼교를 실제로 포함하고 있다[實乃包含三敎]”고 소개했으며, “그 상세한 가르침의 내용의 근원이 《신선의 역사(仙史)》라는 문헌에 상세히 실려 있다[設敎之源, 備詳《仙史》]”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신선의 역사(仙史)》라는 고문헌을 직접 보았다는 얘기입니다. 최치원은 글의 문맥상 풍류도의 상세한 내용을 직접 소개한 《신선의 역사(仙史)》라는 문헌을 직접 보고 이를 바탕으로 <난랑비서>를 작성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에 이장되어 산신령 곧 신선이 되었다는 석탈해의 왕릉. 경주 서북방 표암동 부근 소재. 사진=필자 제공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은 죽은 뒤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서 산신령 곧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삼국사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왕 석탈해는 죽은 뒤에 경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에 이장되어 동악의 산신령 곧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에서 유추해보면, 《신선의 역사(仙史)》란 문헌은 오늘날에는 전해오지는 않지만, 단군이 산신령 곧 신선이 된 것처럼, 나라의 지도자들이 신선이 된 역사를 모아 묶은 문헌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선의 역사(仙史)》란 문헌은 “나라의 신선이된 지도자들에 대한 역사”라는 뜻으로 풀어서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최치원이 “이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신선의 역사[선사(仙史)]》라는 글에 상세히 실려 있다”고 한 것을 보면, 풍류도란, 중국의 유불도 삼교처럼 공자나 노자나 석가모니 등 개인이 가르침을 편 것을 문헌으로 엮은 것이 아니라, 신선이 된 우리 공동체의 지도자들의 집단적인 지혜를 모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국선(國仙)이 되는 역사에서부터 가르침을 추출해 낸 집단적인 철학사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르침의 근원이 《선사(仙史)》에서 비롯됐다”고 밝힌 것을 보면, 신선과 국선(國仙)의 역사로부터 이런 가르침들을 추출해낸 것이 풍튜도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흥왕 때 국선(國仙)을 뽑았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기사 원문 사진. 사진=필자 제공
풍류도가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은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가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나는 풍류도가 유불도 삼교가 들어오기 전에 유불도가 가진 사상 내용을 모두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풍류도는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매우 포괄적인 사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유불도 삼교가 우리 공동체에 전래된 뒤에 이 3교를 종합하고 융합해서 풍류도를 만들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실제 풍류도의 모습에 맞는지는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 모두 똑같이 열려 있지만, 유불도가 우리 공동체에 전래된 뒤에 세 가지를 융합해서 풍류도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본디 우리나라의 풍류도의 가르침이 삼교의 주요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더 타당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풍류도는 출세간과 세속을 아우르는 매우 포괄적이고 융합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풍류도가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유한 사상 체계의 가장 핵심적인 장점은 융합과 통섭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의 추측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서는 유불도와 기독교까지 융합한 동학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풍류도는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實乃包含三敎)”
아무리 고매한 사상과 심원한 종교라 할지라도 인간 세상에 평화와 행복을 증진해주어야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 세상에 대립과 투쟁을 불러오는 사상과 종교라면 존립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고유한 사유인 풍류도는 유불도 삼교를 실제로 포함하고 있음으로써, 자신과 신념의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철학과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과 투쟁하고 대립할 필요가 없음을 풍류도는 일깨워줍니다. 풍류도의 관점에 서면, 유불도 3교 어느 가르침도 유일하게 숭배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는 유불도 어떤 가르침에도 인간 세상이 그 가르침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교 때문에 몇몇 국가들이 대립과 투쟁을 일삼는 것을 보면, 이런 삼교회통의 관점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단재 신채호 선생은 풍류도가 고려 중기에 발생한 묘청의 난(서기 1135년)에서 서경파가 개경파에게 진압 당하면서 인물도 관련 문헌도 모두 말살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에 따르면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정지상, 윤언이 등은 풍류도 사상을 신봉하는 집단이었으며, 그들을 진압한 김부식을 우두머리로 하는 개경파들은 유학과 사대주의를 신봉하는 집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서경파의 인물들이 풍류도를 숭상하는 인물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증거 자료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제시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글에 그런 자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 선생의 판단을 따른다면, 고려 중기까지, 개경파에 의한 풍류도 말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풍류도를 숭상하는 집단들이 이어져 왔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려 중기 이전에 풍류도 관련 인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문헌이나 자료는 매우 빈약합니다. 남북국 시대의 신라에서 활동했던, 최치원, 김가기, 김운경 등이 풍류도적인 기질을 보여준 인물들이라고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계속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