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능소평등 이외에 유사한 개념으로 심경평등(心境平等)과 이지평등(理智平等) 등을 말합니다. 능소평등을 이해할 수 있으면, 심경평등과 이지평등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감각 지각 주체[능(能)]와 감각 지각 대상[소(所)]이 평등한 것[능소평등(能所平等)]을 일러 ‘자기와 같음[여(如), 자기다움, 여여함]’이라고 합니다.[ 能所平等曰‘如’。(元曉, 《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356쪽.)]
감각 지각 주체[능(能)]와 감각 지각 대상[소(所)]이 평등한, 능소평등(能所平等)이란 도대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능소평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각 지각 주체[능(能)]와 감각 지각 대상[소(所)]이 평등하지 않은 상태를 먼저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춘수(1922~2004) 시인은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습니다”[ 김춘수, <꽃>(《김춘수 시전집》, 서울:현대문학, 2004, 178쪽.)]
능소평등에 이르지 못한 시각의 예를 <꽃>이라는 시로 표현한 시인 김춘수. 사진=필자 제공
시인의 상상력을 나무라려는 게 아닙니다. 시인은 이보다 더 심한 주관적인 상상을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김춘수 시인의 주관적 발상법은 우리에게 ‘능소 불평등’이 어떤 것인지를 날것 그대로 매우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김 시인의 주관적 발상법에서는, 감각 지각 주체[능(能)]인 시인이 꽃이라는 감각 지각 대상[소(所)]을 그 이름으로 불러주었을 때 그 대상이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습니다는 고백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시인은 이보다 더 주관적인 백일몽을 통해서도 자신의 사상 감정을 표현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발상법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능소평등과 정 반대의 상황을 너무도 잘 보여줍니다. 능소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감각 지각 주체는 늘 감각 지각 대상을 주관적이고 자의적으로 대상화합니다. 당신이 저 불타듯 아름다운 꽃을 ‘장미’라고 혹은 ‘동백’이라고 혹은 ‘모란’이라고 부르기 전에도 그 꽃은 거기 존재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 꽃을 파악하기 위해 내던지는 어떤 형용도 그 꽃에 대한 외부자의 폭력이자 대상화일 뿐입니다. 아름답다고 찬양하거나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일도 대상화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장미 혹은 동백 혹은 모란은 언어로 짓밟히는 일도 거부하지만, 어떤 숭배나 찬양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찬사나 경배가 없더라도 그들은 아무런 부족도 결핍도 없이 그 자체로 온전히 아름답게 존재합니다. 어떤 판단과 평가를 내려도 능소(能所)의 균형추는 깨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과 분석과 평가를 다 내려놓고 티끌만한 선입견조차 지웠을 때 우리는 능소평등의 상태에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원효는 “감각 지각 주체[능(能)]와 감각 지각 대상[소(所)]이 평등한 것[능소평등(能所平等)]을 일러 ‘자기다움[여(如), 여여함, 자기와 같음]’이라고 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如)’를 저는 “본래의 자기자신과 같다”는 뜻에서 ‘자기다움’이라고 한글로 옮겨보았습니다.
고려 명종 때 원효 스님이 주석했던 경주 분황사에 세워졌던 화쟁국사비석의 흔적. 비석을 세웠던 직사각형 홈이 패어 있고, 홈 밖 윗면 일부에 조선 후기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此和靜國師之碑趺[차화정국사지비부, 이는 화쟁국사(원효를 높여 고려 숙종이 내린 시호)의 비석 받침이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101년(고려 숙종 6) 8월 고승 원효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화정(和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가 주석(駐錫)하였던 분황사에 추모비를 세우도록 명령하였는데, 막상 비석이 건립된 것은 이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명종 때였다. 사진=필자 제공
능소평등의 사유는 어떤 것도 대상화하지 않으며, 어떤 대상화도 거부하는 사상입니다. 가령 우리가 앞 연재 글에서 논의했던 중심주의를 예로 들어보죠. 중심주의는 능소평등과 가장 거리가 먼 사유 방식입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사유하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자의적으로 대상화하게 됩니다. 마치 중화 중심주의의 눈으로 볼 때는 사방의 다른 겨레를 모두 ‘오랑캐[이인(夷人)]’라고 대상화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모든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능소평등에 이르지 못하면 주변의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대상화하는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효는 “감각 지각 주체[능(能)]와 감각 지각 대상[소(所)]이 평등한 것[능소평등(能所平等)]을 일러 ‘자기다움[여(如), 여여함, 자기와 같음]’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와 같음[여(如), 여여함]’을 ‘자기다움’이라고 옮겨도 좋을 것입니다. 장미와 동백과 모란이 어떤 찬사나 경배도 바라지 않고, 어떤 멸시나 폄하에도 영향 받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답게 존재하고 있듯이, 사람들 또한 오랑캐나 야만이라는 멸칭에 동의하지 않으며, 또한 과분한 찬사나 찬양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기답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여여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것은 곧 자기다움입니다.
능소평등의 시야에서 평론한 조선시대 사상가 김만중. 사진=필자 제공
조선시대에 가장 성찰적인 에세이를 남긴 서포 김만중이 “초생달이 물에 잠기니 물고기가 낚시 미늘인 줄 알고 놀라네[잠수어경구]”라는 구절에 대해 비평한 글은 ‘능소평등’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능소평등에 관한 매우 뛰어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감각 지각 주체[능(能)]인 시인이 물 위에서 물을 굽어 내려다보니까, 달이 물속에 있는 것으로 보여서 감각 지각 대상[소(所)]인 물고기가 날카로운 초생달이 물에 들어온 것을 보며 낚시 미늘이라도 들어온 줄 알고 놀랄 것이라고 여기지만, 물고기는 물 밑에서 물 바깥의 달을 쳐다보기 때문에, 달은 물 밖에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럴 일이 없습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사람의 시야만을 가지고 달이 물에 비쳐 들어가면 물고기가 (낚시 바늘이 들어온줄알고) 놀라겠구나 라는 나름 참신한 상상력을 발휘했지만, 김만중은 그것이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볼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일 뿐이고, 물속에 있는 물고기의 눈으로 달을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음을 섬세하게 논했습니다[상세한 논의는 이 연재 34회 참조.]. 능소평등이란 이렇게 인간중심주의와 모든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는 방법론으로 작용합니다. “감각지각의 주체[능(能)]와 객체[소(所)]가 평등한 것을 일컬어 자기다움[여(如)]이라고 한다[능소평등왈여(能所平等曰如)]”는 원효의 명제 덕분에, 우리는 어떤 자기중심주의도 오류이며, 타자를 자의적으로 왜곡함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능소평등이 감각 지각 주체[능(能)]와 감각 지각 대상[소(所)]의 평등함을 말한 것이라면, 심경평등(心境平等)도 여기서 의미가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마음[심(心)] 또한 감각 지각의 주체이며, 경계[경(境)]란 다양한 감각 지각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지평등(理智平等)’은 조금 차원이 다르다. 이치[리(理)]와 지혜[지(智)]의 관계는 반드시 감각 지각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와 같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이치를 멋대로 대상화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치도 인간이 파악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섭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거나 우주의 섭리를 인간적으로 왜곡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인간의 지혜는 이치로부터 끝없이 자양분을 얻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이지평등을 이해하려면 헤겔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입니다.”[ 헤겔, 《법철학》<서문>.]
과연 그럴까. 헤겔의 이 문제 발언은 프로이센 군주를 즐겁게 해주었을 뿐입니다. 현실에 출현하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이성적인 것은 아닙니다. 또 이성적인 것이 반드시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헤겔의 발언은 현실에 너무 큰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이지평등(理智平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현실적 지혜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입니다. 인간세계에 출현한 지혜가 반드시 최선인 것은 아니고, 또 우주의 섭리가 그대로 인간의 지혜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지평등을 염두에 두고 헤겔의 발언을 수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아래의 발언은 헤겔의 발언을 수정한 지은이의 발언입니다.
현실을 과도하게 긍정한 독일 사상가 헤겔. 사진=필자 제공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배워야 하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지혜가 최선인 것은 아니므로 현실의 사태 전개로부터 우주의 섭리를 배워 그 지혜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불합리한 면모는 인간의 지혜에 의해 불합리한 것으로 포착당한 한 인간의 지혜를 바탕으로 개조 당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유가 이지평등(理智平等)이란 말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우주의 섭리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더욱 개선되어야 하며, 깊어진 인간의 지혜는 다시 우주의 섭리를 더욱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소평등, 심경평등, 이지평등이란 말을 통해 원효와 《금강삼매경》의 지은이들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금강삼매경》은 열반과 깨달음과 좌선과 삼매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데 집착하지 않겠다는 마음까지도 일어나지 않도록 지우라고 말합니다. 이런 투철한 정신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봉불살불(逢佛殺佛), 봉조살조(逢祖殺祖)。]”고 외친 임제(臨濟) 의현(義玄) 선사의 투철함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금강삼매경》이 이렇게 투철하게 어떤 아상이나 집착도 다 지울 것을 강조한 것은,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여래장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수양법이며,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자신이 높임을 받는 이가 되기 위한 게 아니라 중생의 삶 속에서 보살도를 실천하기 위한 것임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