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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집 앞에 펼쳐진 겨울 산이 꼭 껴안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어둠이다. 어둠은 저희끼리 의기투합하여, 아직도 물러갈 때가 아니라는 한기(寒氣)와 조합하였다. 견고한 추위를 생산해내고 있다. 며칠 전 내려 녹지 않은 눈이 드문드문 어둠에 대항하고 있는 형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는 있지만, 눈의 색깔을 받아들일 여명이 오려면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간밤에 산속에서 사시사철 무덤의 주인을 알리고 있던 비석에 투숙했던 적막은 날이 새면 빗돌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까. 거기에 변성기를 지난 청년의 패기 같은 바람이 산을 오르내리고 있어, 분명 어둠과 추위는 그 두께가 가볍지 않다.
그래도 어둠을 걷어내려는 불빛으로 첫차의 통과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은 산 아래 자리 잡은 전철역이다. 어둠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불빛의 기능이다. 철저한 자기 색깔 드러내기다. 가뭄으로 여기저기 바닥을 드러낸 중랑천이 그 불빛들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힘차게 달려오는 열차 바퀴 자국이 얼어버린 강의 영혼을 깨워주길 기도하고 있다. 곧 새벽이 오리라.
나는 이렇게 잠이 오지 않아 어둠을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다. 지금 세상을 뒤덮고 있는 지독한 어둠도 곧 물러가리라는 것을. 지독한 한파 같은 전염병인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단시간에 해결하지 못하고 코로나에 맥없이 손 놓은 채 여전히 무기력하기만 했던 우리의 과학이 이제는 불빛의 기능을 하리라는 것을.
계절도 입춘이다. 동양에서는 입춘부터 봄으로 생각한다. 한자도 ‘봄이 선다’, ‘봄이 시작한다’는 뜻으로 설 ‘립(立)’, 봄 ‘춘(春)’이다. 입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절분에서 ‘절(節)’은 계절을 나타내는 글자고, ‘분(分)’은 나누어짐, 즉 경계의 의미다. 그러니까 절분은 기후가 바뀌는 시기다. 겨울의 마지막 날 저녁, 즉, 입춘의 전날 밤을 가리킨다. 계절의 마지막 날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해넘이'라고도 부른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입춘 전날을 절분이라 한다. 일본어 발음은 ‘세쓰분(せつぶん)’이다. 이날은 집에서 ‘마메마키(豆まき)’라고 하여, 창을 열고 콩을 뿌려 사악함을 물리치고 복(福)과 봄을 부른다. 어린아이도 즐기는데, 집안에 뿌린 콩을 자신의 나이만큼 주워 먹기도 한다. 마메(豆)는 ‘콩’이고, 마키는 ‘뿌린다’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우리가 입춘에 길운을 기원하며 벽이나 문 따위에 써 붙이는 글인 ‘입춘대길(立春大吉)’은 한국, 중국, 일본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입춘에 ‘운이 매우 좋다’는 뜻의 대길을 붙여 만든 것. 맑은 날(좋은 날)이 많고, 좋은 일과 경사스런 일이 많이 생기라고 기원하는 뜻을 가진 ‘건양다경(建陽多慶)’도 입춘대길과 함께 우리의 눈에 친숙한 이 계절의 글자다.
이렇게 내가 입춘의 의미를 다시 새기는 것은 무엇보다 지난 해 초부터 우리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국민 재앙인 코로나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올해도 사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긴 어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기와 의기투합하여 우리를 움츠리게 하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계절이다. 내가 친구들과 소통하고 있는 밴드에는 어느 친구의 이런 글이 떠올라서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백신(Vaccine)이라는 말은 스페인어 ‘배카(Vacca)’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배카는 ‘암소(cow)’를 말하지요. 올해는 소의 해. 소에서 나온 백신으로 covid-19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저는 낙관합니다.”
물론, 여명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오세영 「2월」 일부)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그래, 꽃을 살펴보자. 벙글고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계절의 이정표가 되는 입춘에는 세계가 꽃을 피울 준비로 설레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 일본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