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희애 "여성 주목받는 사회, 아직 멀었다"
김희애 "사랑이란 다양한 형태 있어...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입력 : 2019-11-14 06:00:00 수정 : 2019-11-14 09:36:55
[뉴스토마토 김희경 기자]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다. 김희애의 창문은 4월 초의 햇살을 머금은 듯했다. 올해로 데뷔 35년 차가 된 배우.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신인 시절처럼 반짝였다. 작은 칭찬에도 어쩔 줄 몰라 했고, 자신만의 '소확행'을 말할 때는 아이의 엄마가 아닌 꿈 많은 청춘을 마주 보는 것 같았다. 
 
뉴스토마토는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김희애를 만났다. 그는 영화 '윤희에게'(감독 임대형)에서 주연 캐릭터 윤희를 맡았다. 20년 전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 분)을 만나기 위해 딸 새봄(김소혜 분)과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김희애는 오랜만에 취재진을 만난 탓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는 인터뷰가 익숙해지지 않나"라는 말에도 "이번 영화는 특히나 더 걱정을 많이 했다"고 입을 열었다.
 
김희애. 사진/리틀빅픽쳐스
 
"최근 시기가 시기인지라 이번 영화가 개봉한다는 점에 대해 걱정이 많았습니다. 혹여라도 영화의 본질이 잘못 해석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데 다행히 영화를 보신 분들이 저보다 잘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위로가 많이 됐습니다."
 
'윤희에게'를 연출한 임대형 감독은 속된 말로 '상업 영화감독'은 아니다. '만일의 세계', '사분의 오', '레몬타임' 등과 같은 단편 독립영화를 연출했다. 이후 지난 2015년 제5회 들꽃영화상 극영화 신인감독상을 받은 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임대형과 김희애, 처음 두 사람의 합작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의외의 반응이 많았다. 유명 스타와 독립영화감독의 만남은 흔히 있지 않은 조합이기 때문. 하지만 김희애는 시나리오 하나만으로 임 감독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저는 영화를 고를 때 까다롭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에 꽂히는 게 있다면 가리지 않아요. '윤희에게'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가 정말 책처럼 술술 읽히더군요. 그리고 작위적이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매우 현실적이라서요."
 
김희애. 사진/리틀빅픽쳐스
 
 
그가 말하는 '작위적'이란, 극 중에서만 허용되는 말투였다. 가령 관객들에게 '주제 의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하는 대사가 그렇다. 김희애는 이처럼 극적 표현들에 대해 고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 만난 '윤희에게'는 확실히 색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윤희에게'라는 시나리오는 정말 촘촘하게 구성돼 있었습니다. 영화의 톤도 좋았고요. 다른 작품처럼 강렬하게 관객들에게 뭔가를 전하고자 하지 않고, 덤덤한 톤을 유지하는 게 좋았습니다. 요즘 관객들은 다 똑똑하니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해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윤희에게'는 가족, 사랑, 성격 등 삶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김희애의 설명처럼 영화는 관객들에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비춰주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 가타부타 주제 의식을 전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김희애는 이런 감독의 스타일에 매료됐다.
 
"감독님은 평소에 굉장히 수줍은 소년 같은 분이세요. 그런데 글 쓰시는 걸 보면 굉장히 천재라고 생각이 들어요. 반전매력이죠. 저는 '이렇게 똑똑한 분이라면 뭐든지 다 해내실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겨진 천재의 모습을 본 거 같아서, 그리고 그런 사람과 함께 작품을 하게 되어서 정말 뿌듯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감정 연기가 바로 그것. 김희애는 20년 전 첫사랑 쥰과 멜로 연기를 맞추지만, 직접 얼굴을 보는 장면보다는 나레이션이 더 많다. 이 때문에 김희애는 "혼자 감정을 쌓는 것에 대해 어려움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극 중에서 유코 씨와 실제로 마주 보고 연기하는 장면보다는, 나레이션으로 흘려보내는 장면이 많습니다. 윤희의 감정도 표출되기보다는 혼자 갖고 있다가 터트리는 것이 많아서 워밍업을 해야 했죠. 더군다나 둘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씬이라 준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김희애의 이런 노력으로, 윤희와 쥰의 재회 장면은 명장면으로 손꼽히게 됐다. 특히 아무 말 없이 쥰을 바라보다 굵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장면은 그간 윤희가 꼭꼭 숨기고 있던 묵은 감정을 잘 느끼게 해줬다. 김희애는 "유코를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감정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김희애. 사진/리틀빅픽쳐스
 
 
"사실 유코 씨와 길게 대화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촬영 현장에서는 짧게 동선을 맞춰보는 식으로 준비한 게 전부였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죠. 그런데 유코에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간 읽은 시나리오들이 오버랩되고, 나레이션으로 쌓아왔던 감정들이 응축됐습니다. 저절로 슬픈 마음이 생겨났죠. 덕분에 촬영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디테일하고 예민한 작업을 끝낸 뒤, 김희애는 관객들이 윤희의 감정선을 따라가길 바랐다고 밝혔다. "제가 감독을 받은 만큼 보시는 분들이 감동을 받길 바랬다. 그걸 집중시키는 것이 저의 숙제라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이렇게 노력한 이유는 윤희의 캐릭터성 때문이었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감정도 있죠. 부모자식 간의 사랑도 있고, 친구 간의 우정도 있겠죠. 윤희와 쥰의 경우는 더 특별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더 절실하고, 제겐 더 큰 감동을 줬던 거 같아요. 그래서 공부도 많이 했죠."
 
김희애. 사진/리틀빅픽쳐스
 
실제로 김희애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브로크백 마운틴' 등을 참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 내린 것은 결국 하나였다. '모든 사랑은 같다'는 것. 그간 도전해왔던 멜로 연기의 연장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오히려 욕심을 덜어내 지금의 윤희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저는 지금까지 다양한 멜로 연기를 소화해왔습니다. 평범한 남녀 간의 로맨스부터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연하 남성과의 멜로, 불륜까지 보여줬죠. 하지만 모든 캐릭터를 연기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한가지입니다. 오롯이 그 캐릭터에 녹아드는 것. 그래야 관객들이 오글거리지 않고 시청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불필요한 요소를 생각하게 되면 연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다른 건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간담회 당시 김희애는 '윤희에게'가 단순히 퀴어 멜로가 아닌 윤희라는 캐릭터의 로드무비로도 보인다고 털어놨다. 그의 말처럼 이 영화에는 윤희의 사랑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성장통도 담겨있다. 특히 딸 새봄을 향한 애정, 중년 여성 윤희가 인생의 새 출발에 다다르는 순간을 포근하게 담았다. 김희애는 "윤희는 요즘 중년 여성들의 보편적 모습을 담고 있다"고 입을 열었다.
 
"윤희가 새봄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그 나이대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생각나요. 예전에는 남자 형제들에게 밀려나서 공부도 마음껏 못하고, 오히려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죠.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윤희는 새봄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또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의 인생에 집중하는 모습도요. 인생에 늦은 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 같았어요."
 
김희애. 사진/리틀빅픽쳐스
 
"극 중 윤희와 새봄은 그렇게 살가운 모녀 관계는 아니에요. 새봄이는 굉장히 당돌하고, 윤희에게 용기를 주는 존재죠. 그런 새봄을 보면서 윤희는 '나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내 딸은 나처럼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거 같아요. 대부분의 한국 어머니들이 희생한 것처럼 말이죠. 그 덕분에 지금 이 시대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태어난 거 아닐까요?"
 
여성 중심적인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건 김희애뿐만 아니었다. 임대형 감독도 기자간담회 당시 "페미니즘 이슈의 시대정신을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털어놓은바 있다. 실제로 현재 한국 극장가에서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82년생 김지영' 등 다양한 여성 중심 서사 영화가 사랑받고 있다. 김희애는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예전에는 제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남성 캐릭터를 맡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은 확실히 시대가 변했죠. 저는 변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더 큰 변화가 자리잡길 바랍니다. 영화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요."
 
"얼마 전에 극장에서 '82년생 김지영'을 본 적이 있어요. 재밌더라고요. 억지로 어떤 부분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아낸 거 같아서 공감됐습니다. 관객들의 수치를 봐도 알 수 있죠. 그게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 당시를 살아봤던 사람으로서 정말 그때는 그렇게 살았던 거 같아요. 약자였으니, 소외되고 밀려서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죠. 이제는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고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는 거 같습니다. 앞으로도 더 발전할 부분이 많고요."
 
김희애는 최근 놀라운 말을 털어놓은 바 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이제 비로소 배우가 된 것 같다"고 말한 것. '믿고 보는 배우' 김희애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하게 됐을까? 그는 다시 한 번 과거에 있었던 '사회적 편견'에 대해 털어놨다.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고, 오해를 많이 받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저는 예전에는 배우가 아닌 거 같았습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거로 생각했죠. 성격도 활발하지 않고 소심해서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너는 왜 그렇게 건방지냐', '기쁘게 해야지'라는 말도 들었어요. 저는 부끄럽고 민망해서 그런 건데도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정신을 차린 거 같아요. (웃음)"
 
김희애는 '윤희에게'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김혜윤, 성유빈을 보며 오히려 배울 점이 많았다고 밝혔다. "나는 그 나이대에 없던 패기와 뚝심이 있었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특히 김소혜의 연기에 대해선 "내가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절실하고 프로패셔널하게 연기하는 걸 보고 내가 반성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요즘은 경쟁사회잖아요. 소혜가 새봄으로 캐스팅됐을 때도 전혀 의심이 없었습니다. 치열한 요즘 시대에서 캐스팅된 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좋은 사람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연기는 나이 많다고 잘하지 않아요. 공식도 없고, 그냥 타고나는 거 같습니다. 특히 소혜 특유의, 밀어붙이는 뚝심 있는 연기가 아주 좋았어요. 제가 그 나이대에는 결코 할 수 없던 연기였거든요. 지금도 소혜는 후배가 아니라 같은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희애. 사진/리틀빅픽쳐스
 
김희애는 어느덧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는 배우다. 한국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자리잡은 그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겸손함과 다르게 김희애의 취향은 매우 신선했다. 취미가 '저녁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넷플릭스 보기'라는 김희애는 취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눈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너무 좋아해요. 특히 저녁에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와인과 함께 먹어요. 그리고 넷플릭스를 틀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죠. 저는 그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요. 요즘 말하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나 할까요? 요즘 젊은 친구들도 그렇게 산다니, 저는 잘살고 있군요. (웃음)"
 
이뿐만이 아니다. 김희애는 최근 자기계발서에 푹 빠져있다. "내 나이는 이제 나 자신에게 집중해도 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김희애의 이런 모습은 극 중 윤희가 정성스럽게 손으로 이력서를 작성하는 모습과도 닮아있었다.
 
"보통 사람들을 돌아보면 자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지 못하는 거 같아요. 아이도 어른도 힘든 세상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뭐 때문에 그렇게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듯이 살아가나 싶어요. 그 생각이 든 이후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찾아보고, 그거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해요. 제 스스로를 더 돌이켜보는 거죠. 그렇게 충실한 하루를 보내면 그 하루가 10년이 되고, 그게 제 인생이 되겠죠."
 
한편 김희애가 출연하는 '윤희에게'는 14일 극장에서 개봉된다. 

 
김희경 기자 gmlrud1515@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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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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