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국민청원, 보다 더 엄격성 갖춰야
입력 : 2019-11-12 06:00:00 수정 : 2019-11-12 06:00:00
문재인정부는 국민청원제도를 도입해 실시하고 있다. ‘국민이 묻고 국가가 답한다’라는 취지 자체는 참으로 좋으며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점도 있어서 빠른 보완이 필요하다. 지난 4월 말 올라왔던 자유한국당 해산요구 청원은 동의자 수가 180만명을 넘었고, 반대로 더불어민주당 해산 청원도 30만명을 돌파한 바 있다. 불과 한 달 전에는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찬성하는 청원이 76만명, 반대하는 청원이 31만명을 각각 넘었다. 사사건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진보-보수가 갈등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국민이 묻고 국가가 답한다는 취지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진영 간 기싸움이 아닌 진정한 청원제도로 승화하기 위해선 성숙한 국민의식이 필요해 보인다.
 
프랑스에서 운영 중인 청원제도도 100%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그러나 프랑스 언론은 청원제도를 여전히 좋게 평가한다. 지난 9일 프랑스 국민들은 한 아프리카 소녀를 구하기 위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청원을 했고, 정부는 이를 즉각 수용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 놓아 훈훈한 풍경을 연출했다.
 
지난 1월 코트디부아르에서 온 사미라(Samira)는 파리 근교 센 에 마른(Seine et Marne)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다닌다. 이 소녀는 할례를 피해 부모와 함께 본국으로부터 도망쳐 나왔고 법적으로 프랑스에 불법 체류 중이다. 더블린 규정에 따르면 이 소녀는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올 때 맨 처음 발을 디딘 이탈리아 베니스로 가서 보호권을 요청해야 한다. 따라서 오는 12일까지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야만 한다. 그러나 사미라가 이탈리아에 가더라도 체류증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러한 상황을 딱히 여긴 사회당 소속 라파엘 글룩스만(Raphael Glucksmann) 유럽의회 의원은 마크롱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내기로 결심하고 여론을 환기했다. 이에 안 이달고 파리 시장, 마틴 오브리 릴 시장, 배우 마리나 포이즈(Marina Fois), 아델 엑사르쇼플로(Adele Exarchopoulos), 프랑크 뒤보스(Franck Dubosc), 에두아르 루이(Edouard Louis), 오마르 시(Omar Sy) 부부 등 약 200명의 인사들과 국민들이 동참해 15만명 이상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사미라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자 새로운 운동이 시작됐다. 글룩스만 의원은 “유럽의회에서 이 ‘엉터리 같은 규정(더블린 규정)’이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사미라 문제는 일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사미라 같은 상황에 처한 아이들은 프랑스에 적어도 1000명이 넘는다”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글룩스만 의원이 청원서에 첨부한, 마크롱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우리 프랑스(Notre France)’의 일부다.
 
“대통령님, 파투마타 사미라 디코는 10살입니다. 이 소녀는 지금 초등학교 2학년 학기 중에 있고, 매일 아침 공화국의 학교 문턱을 담임선생이나 다른 급우들처럼 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급우들과는 달리 각박한 세상을 거의 다 경험했습니다. 할례를 피해 부모와 함께 코트디부아르를 탈출해 리비아의 지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지중해의 풍랑 속에서 엄마를 잃었습니다. 이 소녀는 이탈리아에서 이민 조건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 소녀는 이미 꼬여버린 인생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안식처로 마침내 우리나라, 프랑스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님, 당신의 정부와 당국 때문에 지금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사미라는 아버지와 함께 11월12일 10시10분까지 프랑스를 떠나야 합니다. 당신이 잘 아시다시피 효과도 없고 정의롭지 못한 더블린 규정이라는 이름으로 각 나라는 개인을 추방하는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당신의 행정부는 표류 중인 이 소녀를 또 다시 사지로 몰고 학교에서 쫓아내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를 당장 중단시키고, 사미라가 여기서 성장하고 배우며 생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 소녀는 이미 이 나라를 무척 좋아합니다.”
 
이에 지난 9일 마크롱 정부의 크리스토프 카스타네(Christophe Castaner) 내무부 장관은 사미라의 서류를 재검토 하겠다고 밝혔고, 재검토 하는 동안 프랑스에 머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프랑스의 이번 청원은 국민들의 서명뿐만 아니라 스토리를 구구절절 담은 진정성 있는 편지가 곁들여 있어 일품이다. 청원(請援)이란 글자가 의미하듯 구원해 주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청원자들의 절박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처럼 숫자놀음만 하는 청원제도와는 확실히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 청원제도도 ‘인터넷 상에서 익명의 시민 100만명이 서명했다’는 등의 숫자에만 주목하지 말고 왜 이 청원을 하고 있는지 스토리를 담은 문서를 첨부해 제출하도록 하면 보다 더 긍정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나아가 하나의 청원으로 부분적인 문제해결에 그치지 말고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파헤치고 치료할 수 있는 계기로까지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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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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