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안중근·박열이 바랐을 한일관계
입력 : 2019-08-16 06:00:00 수정 : 2019-08-17 11:15:45
최한영 정치부 기자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 중 안중근과 박열을 빼놓을 수 없다. 독립운동가라는 점 외에 두 사람의 행적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하고 이듬해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박열은 1923년 천황 암살을 꾀하던 중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이후 무기로 감형, 22년2개월 수형생활을 하고 출소해 1970년대까지 생존한다. 안중근이 공화주의 또는 근왕주의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되는 것과 달리 박열은 민족주의에 기반한 아나키스트였다. '안중근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비난의 초점을 이토 히로부미에 맞추고 천황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해석이 있는 것과 달리 박열은 천황제 자체를 비판했다.
 
공통점도 있다. 두 사람은 각각 평화·정의를 내세운 사상가였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통해 동북아 평화정착 모델을 제시했다. 사형집행일 유언도 "내가 한 일은 동양평화를 위해서였다. 한일 양국이 협력해 평화를 이루기를 바랄 뿐이다"였다. 박열은 출감후 쓴 '신조선혁명론'에서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정의로울 것을 지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일본인 간수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안중근은 수많은 일본인 간수와 관리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이들에게 많은 휘호를 써줬다. 육군 상등병이었던 지바 도시치에게 사형집행 1시간 전 그 유명한 '위국헌신 군인본분' 휘호를 남겼으며 지바는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형무소장 구리하라는 안중근 사형 집행 후 집에 가서 "아까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수감생활을 하던 중 형무소 책임간수장이었던 후지시타 이이치로는 자신의 책에 "나는 선생의 인격에 반하고 굴복해 숭모의 신념을 금할 수 없다"고 썼다. 괴팍해 보였지만 일본인 아내 가네코가 인정한, 순결한 휴머니즘의 공감이 박열의 일생에서 종종 묻어난다.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피해자 배상판결과 일본 경제산업성이 한국을 수출허가 신청 면제대상(화이트리스트) 제외하며 극단으로 치닫던 양국 갈등이 문재인 대통령의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그나마 숨통을 트는 모양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도 "국민들이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에 반대하면서도 양국 국민의 우호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대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며 기존 대일 강경노선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다음날 한일 관계가 얼어붙더라도 민간 교류에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정부간 갈등으로 한일 국민감정마저 안좋아진 상태다. 전쟁과도 같았던 양국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일본인들이 안중근·박열에게 보냈던 존경, 안중근과 박열이 추구했던 평화·정의의 가치가 투영되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필요한 일이다.
 
최한영 정치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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