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경록절, 레몬처럼 신선한 문화 향유의 장
김수철·산울림 김창완부터 크라잉넛·잔나비까지…'문화 르네상스'
크라잉넛 한경록, 정작 생일 당일 오토바이 타고 음료 배달
"돈키호테식 모험…모두의 합심으로 만든 행사"
2023-02-13 17:10:14 2023-02-13 18:04:23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그를 보면 세르반테스 ‘돈키호테’와 모험단들이 연상됩니다. 동화 저편에서 세상 밖으로, 움직이는 실재로 다가오는 모습이. 덜컹거리는 로시난테에 올라타 풍차를 향해 돌진. 그들에게 인생이란 낭만을 믿고 돌진하는 것, 꿈이란 부딪치고 깨져도 풍차처럼 아름다운 것.
 
"'이게 된다고?' 주변에서 물어온 질문들을 저 또한 제 스스로에게 3개월 가량 물어봤거든요. 내가 또 무모하게 저지른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저를 믿고 따라와준 친구들과 재미있는 모험을 하고 온 것 같네요. 돈키호테처럼요. 하하."
 
13일 오전,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 오는 호탕한 웃음소리. 지난 5일간 대중 문화 축제 '경록절'을 마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한경록이 말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분위기에 취해 낮술이나 먹고 있었겠지만, 잠도 푹 자고 '찬란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그는 "(저 혼자 만의 힘이 절대 아니고) 문화 종사자들의 십시일반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 예술가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장이 된 것 같다. 오히려 다시 살아갈 치유와 동력의 힘을 제가 얻었다"고 돌아봤습니다.
 
8일 서울 마포구 합정 인근 '무신사개러지(구 왓챠홀)'에서 진행된 경록절 첫날. 싱어송라이터 정우가 노래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경록절은 ‘홍대 앞 마당발’ 한경록 생일인 2월 11일 즈음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이 출동하는 페스티벌입니다. 올해는 기존 3일에서 5일로 날짜를 연장하고, 미술·문학·과학·건축 등 다채로운 분야 120여 문화예술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흑사병이 지나고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왔던 것처럼, 코로나 기간 억눌렸던 우리나라 문화·예술도 확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마포 르네상스'를 표제어로 내세웠다고.
 
실제로 지난 5일간 미술과 음악, 강연과 공연, 거장과 신예, 관객과 음악가, 남녀노소가 넝쿨처럼 얽히고설킨 축제는 한국 대중음악을 넘어 예술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신선한 문화 향유와 창조는 그의 표현처럼 레몬 같았던 것. 최대 백미의 순간들은?
 
지난 12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피날레 무대를 장식한 크라잉넛.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첫날인 8일, '작은 거인' 김수철(65)이 기타 솔로 잼을 길게 늘어뜨리다, "치키치키차카차카"를 쏟아내고, 뒤따라 무대로 돌진한 '악동 밴드' 크라잉넛이 합동 가위점프(곡 '젊은 그대' 때)를 하며 '청춘의 로큰롤'로 대통합해낸 것. 아니면, 백발 성성 구순(九旬)을 넘기신 김창완(68)의 어머니가 아들의 그림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미술전시회(올해 경록절 사상 처음 도전한 행사, '마포아트센터 갤러리맥'에서 열린 아티스트 8인 특별전 '로큰롤 르네상스')에 꽃 한바구니를 들고 어렵게 찾아오셨던 것. 아니면, 마지막날 '도라지 위스키 한 잔'(곡 '낭만에 대하여')에다 '광안리의 향기'(곡 '부산에 가면')를 불러내던 '낭만가객' 최백호의 그윽한 정취를 파도소리처럼 듣는 것. 
 
또 아니면, 무료로 제공되는 맥주 200만cc의 세계를 탐험하며, 록 밴드로 변신한 멜로망스를 비롯해 롤링쿼츠, 잔나비, 이적, 양파, 유발이, 배드램, 그리고 100여팀의 공연에 뛰어들다, 북토크(조동희)나 과학 강연(김상욱 교수)을 듣는 것. 사실은 전부 다 명장면.
 
8일 서울 마포구 합정 인근 '무신사개러지(구 왓챠홀)'에서 진행된 경록절 첫날. 작은 거인 김수철과 밴드 크라잉넛의 합동무대.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저는 의식주만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술과 문화가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귀찮아서 잘 안 챙겨먹게 되지만, 없으면 괴혈병에 걸리고 마는 비타민처럼요. 그렇지만 사실 삶을 윤기있고 활력있게 하는 것은 그런 비타민이거든요. 그리고 왜, 우리가 보는 초록색도 사실 미세하게 구분하면, 수만가지 갈래와 종류로 나눠진다고 하잖아요. 그런 취향들을 발견하며, 다양한 표정들과 감정들이 교류됐던 행사였던 것 같아요. 마지막 날, 무대에서 양파씨가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을 부르며 울던 모습, 그런 깨끗한 눈물들에 저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을거라 생각했어요."
 
올해 '경록절'의 전시 행사에 산울림 김창완이 출품한 작품. 산울림 김창완의 고희를 넘은 어머니께서 다녀가셨다. 많은 관람객들이 김창완의 명곡 '어머니와 고등어'를 떠올렸다. 사진=캡틴락컴퍼니
 
'캡틴락', 록의 대장이라는 표현답게 한경록은 행사장 전역을 동분서주했습니다. '경록절'인데 정작 본인 생일인 당일(11일)에는 홍대 라이브클럽 4곳의 음료와 포스터 세팅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내달렸다고. "제가 책임져야 하는 행사인데, 그런 일을 후배나 스탭을 시키고 하면 멋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밤 11시까지 클럽 네 군데를 돌아다녔더니 몸이 으슬으슬해 정작 생일 마지막엔 집에서 감기약 먹고 잤습니다. 장시간 온라인 송출을 하던 컴퓨터 에러가 나는 바람에 부랴부랴 했던 기억도 있고요. 하하."
 
"때로 철인5종경기 같은 익스트림스포츠 같기도 했지만 즐겼다"며 웃는 그는 "코로나 이후 경록절이 이렇게 확장할 수 있었듯,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뒤집기는 늘 짜릿하다. 무너질 거 같은데 뒤집을 수 있는 타이밍은 오기 마련이다. 그걸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음악과 예술 창작 세계도, 28주년 크라잉넛의 비결도, 지난해 연말 콘서트 직후 바로 돌입한 경록절이 올해 결국 성황을 이뤄낸 것도 이 같은 록큰롤 정신이 아녔을까.
 
"어제부로 끝난 것은 끝난 것입니다. 축제 분위기에 빠져있거나, 허무한 기분을 느낄 새가 없어요.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뜬 거니까요. 눈 뜨자마자 바로 커피 마시고 방 환기시키고, 회복하고 있어요. 당분간은 '선택을 안해도 된다'는 행복을 잠시 누려보려고요. 하하. 근데 사실 내일 방송 녹음 가야해요. 일 중독자 같지만,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경록절을 마치며 뜻밖의 행복론을 깨달았다고.
 
"저 혼자서 한 게 아니에요. 다 같이 해낸 거에요. 겸손한 게 편하고, 편하면 감사할 게 많고, 감사하면 행복해져요. 놀이동산에 왔듯이 관객들이 시간표를 보며 어디갈지 행복하게 고르는 모습을 보며 저도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인디와 메이저라는 구분을 나누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장르와 세대를 떠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치는 장이 됐으면 하고, 앞으로도 제 역할을 할 겁니다."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 인근 중식당에서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와 만난 올해 데뷔 45주년의 '작은 거인' 김수철과 크라잉넛 한경록. 사진=캡틴락컴퍼니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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