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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서태지, 문화 창조자, 이날의 영웅들
서태지 30주년 특별 기획 시리즈 #9
M세대 문화 종사자들에게 물었다 ‘나에게 서태지란?’
“우리 여기 있어요”
2022-04-06 14:00:00 2022-04-06 20:17:21
<<서태지 데뷔 30주년을 맞아, '권익도의 밴드유랑'은 그간 깊이 다뤄지지 않고 오히려 잘 다뤄지지 않아 간과돼 왔던 부분들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서태지 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미쳐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의미를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더 자세히 들여 보는 내용들이 될 것이다. 평소 서태지가 추구해온 음악적 정신이 ‘큰 울림’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지난 시간 그것을 가슴으로 느껴왔다면, 이제는 머리로써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며 세상과 호흡해보고자 한다. >> (권익도의 밴드유랑)서태지의 ‘잘 안 알려진 얘기들’
 
2008년 8월1일 오후 삼성동 코엑스 앞 특설무대에서 열린 '서태지 게릴라 콘서트'. 사진=연합뉴스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서울 코엑스 일대 잿빛 도시는 수만 인파와 뒤엉켜 출렁댔고, 가운데 박힌 UFO는 별의 분화구라도 보여줄 기세로 기괴한 느낌을 줬어. 
 
2008년 8월1일, ‘대장’(서태지를 부르는 팬들의 애칭) 실물을 처음 본 그날, 그 여름밤은 세계가 두 개로 갈라지는 경험이었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속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날 분명 무정형의 에메랄드빛 초자연을 봤거든.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나는 대장의 세대(X세대)는 아니야. 1992년, ‘난 알아요’가 세상을 삼켰을 때, 손가락을 사탕처럼 넘키려던 6살 빵긋 꼬마였지. 부모님은 내가 ‘하여가’의 태평소 소리에 엉덩이를 흔들며 잘 놀았대. 난 잘 기억도 나지 않는데... 
 
오래된 테이프처럼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기억은 있어. ‘이 작은 CD 한 장이면…’이라 외치던 까까머리 태지형, 빨간 장갑을 끼고 빙빙 돌리던 주노형 공포 안무(어린 내게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는 무서웠어.), 거꾸로 들으면 ‘피가 모자라’가 들린다던 사탄설, 빨간 머리와 노란 기타의 ‘필승’….
 
그리고 3D 우주선 뮤직비디오('Take One')와 충격의 레게머리, ‘울트라매니야’, 고백할게. 그때 방송에서 본 무대 위-아래 등장한 모든 이들이 그냥 미친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어.
 
내 수면의 기억에 가라앉던 서태지가 솟아난 건 7집 ‘Issue’ 때야. 당시 여러 다큐 영상에서 미국-일본 스튜디오를 오가며 자유롭게 창작하던 대장 모습은 입시로 시름하던 방구석 고교생인 내겐 해방구와 같았어. ‘Live Wire’ 멜로디의 전율, ‘큰 울림’을 알리러 배를 타고 떠나는 담대함, 그 와중 장난스러운 소년미. 
 
그때부터 내겐 ‘타임트래블’이 시작됐지. 대장이 왜 혁명인지. 한국 대중음악사를 앞뒤로 나눈 분기점인지 파기 시작했어.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온 여정을 훑으며 다름 아닌 음악 자체에 빠져버렸고, 인생의 길이 뒤바뀌기 시작했어. 지금의 내가 대중음악 담당 기자로, 한국대중음악 선정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도 다 결국은 대장 덕이야.
 
서태지 8집 드럼에 참여한 양혜승(왼쪽)과 권익도 뉴스토마토 기자. 사진=권익도 기자
 
30주년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었어. 대장 주변 사람들은 대장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지점에서 한국 대중음악사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면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일본에 있는 Day-Z 형을 시작으로 피아의 혜승형, 넬 형들을 거쳐 서태지밴드 멤버들까지 아우르며 대장 음악 근원을 탐구해봤어. '93 마지막 축제’ 때 베이스 솔로 연주는 어떻게 구상했는지, 5집 시절 미국에선 어떻게 지냈는지, 다음엔 대장과 제부도에서 조개구이라도 먹으며 들어 보고파. 죽기 전 버킷리스트야. 
 
30주년 기사를 정리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말한다는 것은 시대의 감각을 마주하는 일이며, 지난 30년 간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굴곡을 관통하는 것과 같다는. 그리고 서태지는 여전히 수천수만 화학 작용이 결합된 미래라는 것을. 
 
내 편지는 여기까지. 자유, 도전, 창조 정신으로 무장한 서태지 매니아들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줄게. 나를 포함해 X와 Z 사이 ‘낀’ M세대들이 대장의 음악을 듣고 어떻게 자라왔는지.
 
문화 현장 곳곳 창조 꽃을 틔우는 ‘이날의 영웅들’, '수천수만의 태지'야. 
 
대장. “우리 여기 있어요.”
 
6집 활동 때 일본 '섬머소닉' 출연을 앞두고 빨간 레게머리에서 베이비 펌 스타일로 변신했던 서태지. 사진=서태지컴퍼니·서태지아카이브
 
“음악과 패션에 눈 뜨게 해준 서태지”
 
10 꼬르소 꼬모 서울이라는 편집 매장에서 남성복 바이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해외 디자이너 브랜드 상품들을 바잉해서 한국에 소개하는 업무를 주로 합니다.
 
대장의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부모님이 수요 예배를 가시던 날 저녁 티비를 틀어 가요톱텐을 봤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컴백 무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형형색색의 머리 색깔과 샤우팅 하며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독특해서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빠져든 것은 중학교 3학년 2002 ETPFEST를 갔었는데, 당시 매니아였던 친누나의 영향도 컸고, X-JAPAN을 한참 좋아할 때라 히데 밴드도 보고 싶어 갔었습니다. 그날 보았던 모든 공연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넬과 함께 했던 ‘널 지우려해’ 무대, ‘슬픈 아픔’, ‘TAKE 5’ 등등 그 날부터 빠져든 것 같습니다.
 
서태지는 제게 음악에 관심을 갖게 해줬고, 패션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덕분에 지금 패션 쪽에서 일을 하고 있고요. 
 
삼십대 중반이 넘어가는 나이에 서태지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고민을 해보았는데, 나에게는 이상향, 이정표 같은 사람인 것 같네요. 그래서 가끔씩 현실에 젖어 살다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18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서 한심하게 보고 있을 것 같다고. 겨우 이렇게 살 거면서 어릴 때 그 유난을 떨었냐며. 어디 가서 서태지 좋아한다는 소리하고 다니지 말라고... 20년 가량 서태지를 동경하며 살아온 시간을 반추해보면, 하고 싶은 것에는 일단 도전해봤고, 분노할 일에는 분노하고, 되도록이면 닥치고 살진 않으려고 노력은 해본 것 같습니다. 
 
서태지도 데뷔한지 30주년이 됐고, 저도 30대 중반이 됐습니다. 무슨 의미를 찾는 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다 같이 잘.살.자. 
 
[서태지의 음악은?] 서랍장. 평소에는 잘 열어 보지 않지만, 한번 열어보면 몇시간은 그 안에 있는 추억들을 돌아보며 시간여행을 하는 것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곳. (이창용 10 꼬르소 꼬모 남성복 치프 바이어)
 
브라질 '서태지 매니아 숲'. 데뷔 20주년 당시 서태지매니아(팬덤명)는 서태지 이름을 딴 숲을 브라질에 조성했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팬덤이 숲을 조성한 첫 사례다. 당시 팬덤은 브라질의 열대우림 지대인 과피 아수 5ha 넓이의 땅을 모금액 3800만원 정도로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팬들은 서태지의 매니지먼트사인 서태지컴퍼니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숲 조성을 위해 영국의 환경보호단체 '월드 랜드 트러스트'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사진=서태지컴퍼니
 
“3년 내내 도전한 디자인, 서태지 시대 정신”
 
IT회사에서 모바일 앱/웹 UX/UI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어려움 없이 쉽게 모바일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화면 전체의 흐름과 경험을 설계하고, 불편한 점을 청취합니다. 
 
사회/문화적 이슈를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온라인 서비스를 누구나 동등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디자이너가 아니었습니다. 디자인과는 다른 분야의 직장에서 일을 하다, 20대 후반의 어느 터닝 포인트 지점에서 다시 디자인 학교 입학을 준비했고, 3년 내내 밤을 새워 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그 몇 년의 시간이 줄곧 제게는 도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백지의 공간을 아름다운 요소들로 체계 있게 구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에, 결국 서태지가 강조한 시대 정신(자유, 도전, 창조) 대로 자유롭게 도전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친언니의 영향으로 꽤 어렸을 때부터 서태지와 아이들 3집, 4집을 처음 들었습니다. 국민학교 입학 전으로 기억합니다. 본격적으로는 서태지의 솔로 컴백, 5집 이후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서태지와 그의 음악은 무모함을 믿고, 견디고, 버틸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저를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그의 음악과 발자취를 함께 동행하며,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묵묵히 해나갈 수 있는 담담한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태지의 음악은?] 첫 눈이 오는 따스한 겨울날. 학창시절 부터 첫 눈이 오는 날에는 꼭 의식처럼 Free Style을 들으며 길을 걸었습니다. 겨울은 혹독하고 추운 계절이지만, Free Style은 그 추위를 상쇄하는 경쾌하고 눈부신 리듬으로 따뜻한 햇살의 겨울 첫 눈을 떠올리게 합니다. (IT 업계 디자이너 A씨)
 
8집 게릴라 콘서트 현장에서 매니아들과 교감하는 서태지. 사진=연합뉴스
 
“서태지 시대정신, 공기처럼 함께 했던 것”
 
이태원, 홍대, 압구정에서 언더그라운드 하우스, 디스코 음악 등을 트는 디제이를 하면서 포스터나 앨범 디자인 일도 하고 있습니다. 
 
처음 들은 건 데뷔 무대 부터였습니다만 본격적으로 빠진 건 1집 활동 중 나왔던 Live&Techno Mix 앨범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환상 속의 그대의 리믹스 방식을 따라 하기 위해 카세트테이프 데크로 리믹스를 흉내 냈던 기억이 있네요.
 
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나에게 자유, 도전, 창조는 매니아 정신이기도 하지만 시대정신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시쳇말 같은 단어들이지만 그 당시의 우리 세대들에겐 공기처럼 항상 함께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즐겁게 저항하자’ 교실이데아와 시대유감을 들으며 자란 나에게 삶을 즐긴다는 건 그 자체로 저항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ROCK THE WORLD’라는 이름의 파티를 열어 즐거운 밤을 보낸 수익금을 사회에 기부하는 파티를 열었던 것도 그 맥락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10대 때 제가 듣던 음악들에 집중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그가 영향 받은 음악임을 종종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가 사용한 악기들, 그가 사용한 샘플들을 우연히 발견할 때면 내 망상 속에 1~20대의 정현철과 같이 디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30주년이 되어서야 조금 더 인간 서태지에 좀 더 집중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서태지의 음악은?] 좋은 디제이가 노래를 틀고 있는 어떤 공간. 정말 좋은 DJ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한곡 한곡 틀면서 공감을 이끌어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서태지는 그런 존재. 그와의 교감 기억들은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DJ MAKI)
 
서태지 8집 활동 당시 서울 명동 우리은행 사거리에서 열었던 게릴라 콘서트 형식의 SBS '가요대제전' 사전녹화 당시 서태지매니아. 사진=뉴시스
 
“빅팀 시위 하던 제가 직배사 직원이 됐지요”
 
전 직장 얘기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13년 전 쯤 공연 기획사에서 기획과 홍보를 했었고, 근무했을 당시에 운이 좋게도 태지님을 몇 번 뵐 기회가 있었어요. 다들 인사하라고 등 떠밀고 했는데… 쑥스러워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돌아보니 지금 아쉬운 감정이 두고두고 납니다. 앞으로 언제 뵐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눈 딱 감고 그냥 인사할 것을... 현재는 음반사(직배사)로 이직하여 해외 팝 음악들을 마케팅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수천 곡 이상 발매되는 싱글과 앨범들 중에서 국내마켓에 적합한 곡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서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소개하고 홍보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필승뮤직비디오와 컴백홈 무대를 봤습니다. 아마도 가요톱텐이었던 거 같은데요. ‘저 머리는 뭐야..?’ 하며 신기하게 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후 저는 중학생이 되었고 6집 ‘울트라맨이야’ 때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음악이 멋있다고 느끼게 됐습니다. MBC 음악캠프의 사전녹화 영상을 본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포공항의 삼각김밥 머리에서 업그레이드 된 빨간레게 머리를 하셨잖아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등장했는데 그 레게머리의 모습이 정말 잘 어울리시고 멋있었어요. 
 
음반사에서 일을 하다 보니 한명의 뮤지션이 새로운 스타일과 장르를 계속하여 창작하고, 새롭다는 결과물이 대중적인 관심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많이 봐왔습니다. 그래서 앨범마다 새로운 결과물을 내는 뮤지션들을 보면 존경심이 들고 이건 천재다 싶은데, 태지님은 항상 매 앨범마다 새로운 도전을 선보이시잖아요. 다만 이러한 시선들이 부담이 되실 거 같긴 해서 B-side의 음악들이나 캐주얼하게 작업하신 음악들도 궁금해요. 너무 작정하지 않고 만드신 결과물들이요. 부담 없이 편하게 다작하시며 음악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
 
태지님만큼 제가 좋아했던 건 매니아들의 열정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들이었어요. 일명 총대라는 걸 많이들 나서서 맸죠. 7집 ‘Issue’ 앨범의 수록곡 ‘Victim’이 낙태를 주제로 한 음원이라는 이유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고 다들 이를 되돌려보고자 시위와 플래시몹도 하고MBC 앞을 점거했던 기억도 납니다. 비록 이런 과정을 통해 변화가 쉽지는 않지만 도전이라는 의미로도 값어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태지님 덕분에 다양한 음악 장르를 편견 없이 들었고 그로 인해 현재의 직업까지 흘러온 거 같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매니아로 지내온 자양분들이 직업적인 부분에서 발현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예를 들면 태지님은 컴백 전에 디테일하게 마케팅을 기획하셨잖아요. 김포공항의 등장씬이나 UFO나 미스터리서클 등. 단순한 컴백이라는 게 아니라 세상의 이목과 주목을 끄는 걸아는 뮤지션이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과정들의 고민이 느껴져요. 음악업계에 있다 보니 태지님이 화제와 동시에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려했다는 걸 깨닫습니다. 벌써 30주년이라니, 앞으로 어떠한 뮤지션에게 이렇게 내가 다시 열광할 수 있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서태지의 음악은?] 달력. 태지님이 워낙 숫자로 티저를 하시는 걸 좋아하시잖아요. 30주년이 되는 올해에 2022년 2월 22일에 10집 앨범으로 돌아오시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내심 기대했는데 육아로 바쁘신지 돌아오시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새로운 음악 기대하고 또 기다립니다. (글로벌 음반사 한국법인 B씨)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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